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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자대학교의 미래지향적인 중앙 계단.

    교육의 중심

    교육학과가 대표적이며 우수한 교육자들을 탄생시킨 이화여자대학교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 신촌 거리의 4대 대학교 中 하나입니다. 또한, 대한민국에는 많은 여자대학교들이 있지만, 성북구의 위치하고 있는 성신여자대학교와 인기 순위를 앞다툴 만큼 많은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여학교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으로 대한민국에서 5번째로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입니다. 이화학당은 '대한민국 교육의 근본이념에 기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고등교육, 중등교육, 초등교육 및 유아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창립이념을 가지고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메리 F. 스크랜튼 여사에 의해서 창설 됐으며, 1년 뒤인 1887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칭호를 하사 했습니다. 1910년 대학과 신설과 1914년 조선총독부의 허가로 부속유치원을 설치 및 경영을 하며 교육의 중심이 된 이화여자대학교의 찬란한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대, 이화여자대학교 소속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이어서 설치 및 경영을 하며 창립 이념을 따르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학교는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인 메리 F. 스크랜튼 여사를 포함하여 총 14명의 총장이 학교를 대표하여 운영을 해왔으며, 2024년 현재 총장은 김은미 총장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성숙한 기독교적 인격과 헌신적 봉사정신, 그리고 전문적 학술지식을 바탕으로 남녀 양성의 평등이 조화롭게 완성된 사회를 구현해 가는 개척자적인 여성 지도인력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설립 이후 이제까지 18만여 명의 여자 대학 졸업자를 한국사회에 배출한 것은 여성 고등교육 인구의 저변 확대를 목표했던 이화의 괄목할 만한 성과입니다. 3.1 운동 이후 열화와 같이 일기 시작한 민족교육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고, 유치원 사범과 와 같은 새로운 교육기구를 설립하여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2세 국민교육과 교사 양성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으며, 조국 광복과 함께 대학의 문을 활짝 열고 다양한 전공학과를 앞장서 개설하여 여성전문교육 확대에 주력하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국내 최초로 평생교육원을 설립하고, 다양한 특수대학원과 전문대학원을 설립함으로써 이화의 교육기능을 확장하고 극대화하였습니다. 이화가 배출한 인재들은 종교계와 교육계는 물론이고 인문, 사회, 자연, 예술계 등 각 방면에서 여성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이화 교육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화 역사의 페이지마다 무수히 붙어 있는 '최초'라는 접두사는 이화의 특별한 목표가 아니라 기독교 정신과 진선미의 이념을 실천하는 개척자적인 여성지도자 양성을 위해 힘써온 이화의 고난에 찬 노력과 인고의 결과였습니다. 이화의 교육은 또한 모든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을 넘어서서 남녀 양성의 평등이 조화롭게 완성된 사회를 이룩하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 이화는 교육을 통하여 여성의 능력을 개발하고 온전한 인격화를 이룸과 동시에 끊임없이 남성들의 인식 변화를 유도하였습니다. 여성들의 자각과 사회활동을 통해 남성들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유도해 온 이화는 1970년대 중엽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개설한 '여성학'을 통해서 남성들의 인식 변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해 왔습니다. 남녀가 조화롭게 동반자로서 공존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그 절반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회, 그것은 아직도 이화가 추구해야 할 목표로 존재합니다. 이화는 섬김과 나눔이라는 이화정신에 뿌리를 두고 21세기 우리 사회와 세계가 요구하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이화 교육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이화만의 발전을 넘어서 겨레와 조국을 섬기며 공동선을 향해 인류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한 이화의 궁극적인 목적에 한 걸음 더 다가서고자 합니다.

    김활란 박사

    김활란 박사는 재단법인 이화학당의 1대와 3대 이사장이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제7대 총장으로 학교를 대표했습니다. 박사는 이화 역사 중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민족행위자 등의 이유로 이화여자대학교의 학생들에겐 여러 방면에서 부정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그 당시의 나라의 문제로 인해 재단과 학교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경도 있지만 그녀가 한 일을 보면 과연 억지로 했을까 싶을 정도의 역사적 일들을 했습니다. 중일싸움이 발발한 이후부터 조선총독부가 지원하는 조선부인연구회, 방송선전협의회, 애국금차회에 참여했고, 국민전신총동원조선연맹과 조선언론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을 통해 강연 등을 통해 일본의 지원을 선동하는 친일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한민족 말살정책인 신사참배 강요에 협조하고, 징병을 권유하는 강연에도 앞장섰다는 것이 그녀의 역사적으로 잘못된 행동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친일민족행위를 함과 동시에 이화여자대학교를 키워 캠퍼스를 확장하고, 대한민국이 일제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최초로 종합대학 인가를 받아내며 총장 역할도 충실이 이행했습니다. 친일행위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화여자대학교는 그녀의 동상을 본관 앞에 설치를 했습니다. 현재, 김활란 박사의 동상을 두고 이화여자대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역사 앞에 당당한 이화를 바라는 이화인 일동'의 단체 중심으로 철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이 단체는 그녀는 절대 이화의 큰 스승이 될 수 없고 시간의 흐름이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며 특히 일제 말기 대표적 여성 친일파로 변절해 조선인 징병, 위안부 모집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사실은 부끄러운 역사라고 강조하며 친일 성향이 명백한 인사를 찬양하는 동상을 유지하고 그 행적을 숨기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행위라며 단체와 뜻을 함께할 1천 인의 이화인을 모집해 팻말을 세우겠다고 밝혔습니다. 또 알림 팻말을 세운다고 동상 자체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며 궁극적으로는 동상 철거까지 나아갈 것이며 이대에 서는 동상의 주인공은 김활란이 아닌 유관순 열사여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박혜진 법의관

    이화여자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여 대한민국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최초 여성 법의관인 박혜진 법의관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단,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최초 여성 법의학과장입니다. 이곳의 박혜진 법의관은 4급 서기관급 법의관으로 국과수 부검의들 사이에선 홍일점으로 통합니다. 지금까지 박 법의관의 손을 거쳐 감정된 시신만 2,000여 구이며, 그녀는 과학수사 파트에서 철두철미하고 꼼꼼한 베테랑 부검의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혜진 법의관은 이화여자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89학번입니다. 그녀는 여성이 선호하는 피부과, 내과 등을 선택하지 않고 해부병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으며, 법의관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보다는 책임감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국과수는 변사체의 죽음의 원인만 감정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법과학 수사 감정기관인 이곳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누어집니다. 약물, 독물 분석과 마약분석, 화학분석, 화재 감정, 교통사고 분석을 담당하는 법과학부와 변사체 사인 감정, 유전자 분석, 범죄심리 분석, 문서 및 영상 분석을 포함한 법의학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법의학부입니다. 특히 부검은 범죄사건의 과학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정입니다. 모든 죽음은 병으로 죽는 원인이 아니라면 법의학적으로 사인이 밝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의관은 죽은 자의 사법적 사인을 가리기 위한 최일선의 감정사인 셈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왜 죽었나를 밝혀내는 직업입니다. 질식사인지 약물중독인지 사인을 밝혀야 하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병사인지 의료사고인지 죽음의 종류를 알아내는 일련의 조사를 수행해야 합니다. 국과수를 거치는 사체는 한 해에 7,000여 구이며 서울 신월동 본소를 비롯해 서부 분소, 동부 분소, 중부 분소에 재직 중인 법의관은 총 17명입니다. 전국의 사건사고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라는 지적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소장과 보직자가 부검에 전념할 수 없는 실정을 고려하면 겨우 12, 13명의 법의관이 한 사람당 연간 300~400구의 사체를 부검하는 실정입니다. 2004년 연말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 현장에 자국의 희생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법의학팀이 파견된 적이 있습니다. 희생자들이 무더운 날씨에 물속에 잠겨 있던 터라 신원 확인이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퉁퉁 부은 손가락을 붙잡고 어떻게 지문을 채취할지 우왕좌왕했는데, 한국팀은 3분 만에 간단하게 지문을 채취했습니. 손가락을 뜨거운 물에 잠시 담갔다가 단백질 응고현상을 이용해 간단하게 지문을 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한국팀이 가장 먼저 희생자 전원의 사체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이지만 한국의 과학수사는 세계적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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